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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신이 7전 4선승제의 한국시리즈 7차전을 앞둔 감독이라면 한국시리즈 7차전 선발로 어떤 투수를 내보내겠습니까? 선동열, 최동원, 김시진, 박철순, 송진우, 이상훈, 손민한, 이상군, 정민태, 김수경, 김상진, 한용덕, 조계현, 김상엽, 이대진, 배영수, 김광현, 류현진, 윤석민 등 많은 투수들이 있을것입니다. 저라면 1초의 고민없이 정민철입니다. 이글스를 위해 오랬동안 던졌던 이글스의 에이스 정민철입니다.




 정민철은 1992년 4월 5일 대전구장에서 열린 LG 트윈스와의 경기에서 구원등판으로 데뷔하여 0.1이닝동안 2피안타 1홈런을 맞고 3실점(자책점)을 하였습니다.(만루상황에 등판해서 김동재선수에게 만루홈런을 맞음) 그의 첫 데뷔전은 좋지 못하였지만 등번호 55번의 오렌지색 스프라이트 유니폼을 입은 마른체구의 선수는 씩씩하게 공을 던졌고 그 해 돌풍을 일으키며 14승(다승 6위) 4패 7세이브(세이브 8위) 195.2이닝 투구 10완투(5위) 3완봉(1위) 145개의 탈삼진(탈삼진 2위)을 잡아내었습니다. 그가 기록한 2.48의 방어율은 리그 2위에 해당하는 기록입니다. 하지만 그 해에는 더욱 대단한 신인인 롯데 염종석 선수(17승 2.33 방어율 1위)가 있었고 신인상은 롯데 염종석 선수의 차지였습니다. 팀은 정규시즌 1위로 한국시리즈에 직행했지만 롯데 자이언츠에게 생각지도 못한 일격을 당하며 준우승을 합니다.




 93년 정민철은 방위복무를 겸하며 홈경기에 등판(예전에는 방위복무로 홈경기에 등판이 가능했었습니다)하며 18경기(선발등판17경기)에 등판하여 13승 3패 1세이브 148.1이닝 투구 탈삼진 110개 2.24의 방어율(방어율 5위)을 기록하였습니다. 생애 첫 타이틀인 승률왕(0.813) 타이틀을 획득하게 됩니다. 93년 기록에서 주목할점은 승패 방어율 탈삼진이 아닌 투구이닝입니다. 바로 18경기에 등판해서 148.1이닝을 투구했다는 사실입니다. 경기당 투구이닝을 계산해보면 한경기당 8.1이닝정도를 투구한 셈입니다. 경기에 나오면 기본으로 9회 1아웃까지는 던졌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게다가 18경기중 한경기는 구원등판으로 세이브를 기록했으니 선발등판시 경기당 이닝은 더욱 높아집니다. 등판하면 9회 1아웃까지 기본으로 던져주며 경기당 2.24점을 실점하는 투수... 상당히 매력적이지 않습니까?




 94년에는 빙그레 이글스에서 한화 이글스로 팀명이 바뀌게 됩니다(당시 충청 이글스와 한화 이글스중에 한가지가 될것이다 라는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한화 이글스로 바뀐 첫해 94년부터 정민철은 팀의 1선발로 활약하게 됩니다. 94년 6월 17일 대구 삼성전 1피안타 무사사구 완봉승 94년 9월 23일 대전 해태전 1피안타 무사사구 완봉승을 포함하여 14승(1구원승) 10패 9완투(3위) 4완봉(2위) 218이닝(경기당 투구이닝 7.2이닝) 196탈삼진 2.15의 방어율을 기록하며 최고의 시즌을 보냅니다. 방어율 1위와 탈삼진 1위로 2관왕을 달성합니다. 218이닝(경기당 투구이닝 7.2이닝) 196탈삼진 방어율 2.15의 좋은 성적을 거두었음에도 14승(다승 6위)밖에 하지 못하고 10패나 기록하게 된 이유로는 94시즌 퀄리티스타트(6이닝이상 3실점이하 투구)를 하고 승리하지 못한경기가 9경기나 되며 그 중 7경기는 패전으로 기록되었기때문입니다.(저 경기중에 절반만 건졌어도......아쉽습니다... 94년 8개팀중 이글스 팀타율 6위 팀득점 7위... 우스겟소리로 정민철이 1실점하면 이기고 2실점하면 진다는 말도 있었습니다.) 팀은 준플레이오프에서 해태 타이거즈를 물리치며 플레이오프에 올라갔지만 태평양 돌핀스에게 지며 한국시리즈 진출에 실패합니다.(제 기억으로는 94년 플레이오프에서 시리즈전적 0승 2패로 몰리는 상황에서 맞이한 3차전 경기후반 당시 팔꿈치부상으로 방망이를 휘두르기도 힘들었던 장종훈선수가 대타로 나오게 됩니다. 장종훈은 거의 한팔로 스윙을 하여 공을 맞췄지만 공은 포물선을 그리며 유격수 염경엽선수의 글러브에 들어가게 되었고 경기는 그대로 흘러가며 결국 돌핀스는 2:1로 이글스를 누르고 3연승으로 한국시리즈에 진출합니다)




 95년에도 여전히 이글스의 에이스로 활약하며 13승 7패 162.2이닝 3.21의 방어율을 기록합니다. 95시즌 중후반 오른손 손가락부상으로 한달 보름정도의 공백기가 있었고 그로 인해 좋은성적을 기록하지는 못하게 됩니다. 팀은 6위에 머무릅니다. 95시즌이 끝난후 한일 슈퍼 게임에 참가하여 오사카 고시엔구장에서 열린 3차전 선발투수로 나와서 승리투수가 되며 3-2 한국의 승리를 이끌었고 3차전 우수선수에 선정됩니다. 5차전에는 구원투수로 등판하였고 총 2경기에 출장 1승 1.93의 방어율과 탈삼진9개를 기록하였습니다. (참고로 이글스의 참가선수는 장종훈, 정민철, 구대성 이었으며 장종훈은 한일슈퍼게임동안 전경기 4번타자로 출장하였고 구대성은 전경기출장 1세이브 방어율 0.00을 기록하였습니다. 한일 슈퍼게임은 2승 2무 2패로 마무리 되었습니다.) 정민철은 이어 열린 제 1회 아시아 퍼시픽 슈퍼 베이스볼 대회(클럽간 국제 대항전으로 한화 이글스, 다이에 호크스, 통일 라이언즈, 호주선발팀이 참가하였습니다 지금의 아시아시리즈와 비슷한 대회입니다.)에 참가하여 1차전 호주전 선발투수로 등판하여 13개의 삼진을 잡으며 호주선발팀에게 6:0으로 승리하였습니다.



 

 96년에는 13승 12패 1세이브 219.2이닝 203탈삼진(탈삼진 2위) 방어율 3.03을 기록하였고 200이닝 200탈삼진을 기록하게 됩니다. 팀은 준플레이오프에 진출하여 1차전 현대 유니콘스와의 대전경기에 정민철은 등판했지만 5이닝동안 6실점하며 팀은 0-15로 패배하였고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합니다. 97년에는 14승(다승 3위) 11패 208.2이닝 160탈삼진(1위) 10완투(1위) 4완봉(1위) 방어율 2.46을 기록하며 방어율 4위 탈삼진 1위에 오르게 됩니다. 97년 5월 23일은 프로야구의 대기록이 만들어질뻔한 날입니다. 대전구장에서 있었던 OB 베어스(현재 두산베어스)와의 경기에서 8회 1아웃 심정수(삼성에서 은퇴)의 타석에서 포수 강인권의 실수로 스트라이크 낫아웃 상황이 발생하면서 심정수를 1루로 내보내게 되면서 퍼펙트가 무산되고 결국 그경기는 프로통산 첫번째 퍼펙트게임이 아닌 프로통산 9번째 노히트노런게임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돌이켜보면 정민철에게는 퍼펙트게임을 달성할 수 있는 3번의 기회가 있었습니다. 94년 2번의 1피안타 무사사구 완봉승, 그리고 97년의 프로통산 9번재 노히트노런, 아쉽게도 간발의 차이로 퍼펙트게임이 되지 못했습니다. 퍼펙트게임은 선수의 실력과, 그날의 경기운, 그리고 하늘이 도와야 이루어 질 수 있나봅니다. 그리고 97년에는 처음으로 올스타전 선발투수로 등판을 했습니다. 팀은 하위권인 7위를 합니다.



 

 98년에는 팔꿈치 부상과 재활로 인해 10승 7패 148.1이닝 97탈삼진을 기록하였고 데뷔후 6년연속 100탈삼진 기록을 멈추게 되었습니다. 98년에도 팀은 여전히 7위입니다. 99년에는 데뷔후 가장 많은 승리인 18승(다승 2위) 8패 1세이브를 거두고 201.2이닝 151탈삼진 방어율 3.75를 기록하게 됩니다. 방어율이 약간 높기는 하지만 당시 98년부터 도입된 용병제등의 영향으로 타고투저시절이었고 3.75의 방어율은 리그 6위의 기록입니다. 97년에 올스타전 선발투수에 이어 99년 올스타전 매직리그 선발투수로 나와서 무실점으로 잘 던졌으며 팀은 시즌막판 연승을 하면서 간신히 4위(매직리그 2위)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하게 됩니다.(당시는 양대리그제도였음) 송진우(15승), 이상목(14승), 돌아온 홈런왕 장종훈 선수와 잘 뽑은 두용병 데이비스와 로마리오, 96년 신인들(송지만,임수민,이영우)의 활약과 강석천의 부활, 적절한때에 대타로 나와 한방을 날리곤 했던 최익성, 든든한 대성불패 구대성의 활약과 노장 이상군, 한용덕선수가 힘을 보태면서 1999년 팀을 첫 한국시리즈 우승으로 이끌게 됩니다. 팀의 에이스인 정민철의 역할이 컸음은 말할것도 없습니다. 롯데 자이언츠와의 한국시리즈 1,4차전에 선발투수로 등판하여 2경기 13이닝 13피안타 7사사구 9탈삼진 4실점 방어율 2.77로 2승을 거두며 팀의 우승에 한몫을 하게 됩니다.(1차전 6-3승 5.1이닝 3실점, 4차전 2-1승 7.2이닝 1실점) 한국시리즈 MVP는 5경기 모두 출장하며 1승 1패 3세이브(4세이브포인트. 이당시에는 구원승과 세이브를 합산해서 세이브포인트로 계산하였음)를 올린 구대성이 되었습니다. 1999년 시즌후 서울 아시아 선수권 대회에 참가하여 좋은 활약을 합니다. 데뷔후 8년연속 두자리수 승수를 거두며(8년연속 두자리수 승수는 이강철(10년연속)에 이은 2위의 기록) 99년까지 젊은나이에 219경기 109승 62패 1503이닝 1189탈삼진 피안타율 0.223 WHIP 1.07 59완투 19완봉승 방어율 2.80을 기록하며 통산투수부분의 모든 기록을 갈아치울 기세였습니다.




 2000년도에는 일본의 명문팀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입단하게 됩니다. 팀에 입단후 2000년 5월 19일 진구구장에서 벌어진 야쿠르트와의 첫 등판에서 7이닝 1실점으로 승리투수가 되었으나 2군 통보를 받는 등 외국인선수에 대한 차별과 리그적응실패, 팔꿈치 부상등과 같은 여러요인으로 2시즌동안 3승 2패 방어율 4.70의 성적으로 일본에서의 선수생활을 마무리 하게 됩니다. 2002년 한화 이글스로 복귀했지만 90년대의 에이스 정민철의 모습은 보기 어려웠습니다. 2002년 7승 13패 방어율 5.35를 기록하며 9년연속 두자리수 승수에 실패하였으며 2003년 11승 10패 방어율 4.00 을 기록하게 되고 2003년 시즌후 팔꿈치 뼛조각 제거 수술을 받게 됩니다(처음에는 재활을 하려 했으나 수술로 결정) 수술 휴유증으로 인해 2004년에는 0승 6패 방어율 7.67을 기록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 이후에도 팔꿈치 통증은 계속 정민철을 괴롭힙니다. 그 이후에도 거의 매시즌마다 팔꿈치 통증으로 선발 로테이션을 조금씩 거르게 됩니다. 98년도 팔꿈치 부상일때 그리고 일본선수시절 조금더 신경을 썼더라면 조금더 좋았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2005년 등번호를 55번에서 23번으로 바꾸고 9승 3패 방어율 4.82를 기록하며 재기에 성공합니다. 팀은 포스트시즌에 진출했지만 정민철 선수는 팔꿈치 통증이 재발하여 경기에 나설수 없었고 팀은 플레이오프에서 두산베어스에게 져서 탈락하게 됩니다. 




 2006년 7승 13패 방어율 3.93을 기록합니다. 2006년 시즌중반 비로 인한 취소경기가 많아지면서 하위순위선발이었던 정민철은 선발로테이션 순서가 밀리면서 오랫동안 등판을 하지 못하고(예: 1선발 2선발 우천취소 우천취소 우천취소 1선발 2선발 3선발 우천취소 우천취소와 같이 우천취소로 인해 하위순위 선발투수들이 등판을 하지 않게 되는경우)쉬게 되면서 팔꿈치 통증이 많이 없어졌고 전력투구가 가능하게 됩니다. 이 당시 구속이 최고 146km(TV중계방송 스피드건)까지 나왔으며 당시 한용덕 코치님과의 공수교대때의 경기장에서의 대화(좋아지고 있다는 내용)가 중계방송을 통해 나가기도 했습니다.(8월 2일 사직구장 롯데 자이언츠와의 경기로 기억합니다)  2006년 괴물신인 류현진과 부활한 문에이스 문동환의 활약으로 팀은 포스트 시즌에 진출하게 되고 정민철은 상승세를 타고 포스트시즌에서 좋은 투구를 보이게 됩니다. 현대 유니콘스와의 플레이오프 1차전에서 팀이 패하게 되면서 자칫 분위기가 넘어갈수 있는 상황에서 2차전을 맞이하게 되고 정민철은 5.1이닝 5피안타 2탈삼진 1실점으로 호투하며 4-3 팀의 승리를 이끌게 됩니다.(우익수 김수연선수의 호수비 포함) 2차전 승리투수와 데일리MVP가 되었습니다. 당시 현대 유니콘스의 김재박 감독은 정민철의 투구동작를 지적하며 잘 던지고 있던 정민철의 투구리듬을 흔들기도 하였으나 정민철선수는 노련하게 현대 타자들을 상대하였습니다.(김재박 감독이 심판에게 유니콘스의 타자들을 상대로 잘 던지고 있던 정민철의 투구동작을 문제삼았으나 문제가 없는걸로 판정, 받아들여지지 않음) 결국 이글스는 한국시리즈에서 삼성 라이온즈와 우승을 놓고 다투게 되었습니다. 한국시리즈 2경기 선발등판(2차전,5차전)하여 3.12의 방어율로 좋은 투구를 하였지만 이글스 선수들이 준플레이오프 플레이오프를 거치면서 누적된 피로와 선발의 한축이었던 송진우선수가 팔꿈치 통증으로 한국시리즈에 나설수 없게되면서 당시 강팀이었던 삼성 라이온즈를 넘기에는 조금 부족했습니다. 한국시리즈에서 지연규 선수의 역투(한국시리즈 5차전)와 함께 2006 시즌을 준우승으로 마무리합니다. (한국시리즈 3,4차전 이틀연속 아쉬운 연장패배와 준플레이오프부터 많은 투수들이 던진 상황이고 공을 던질수 있는 투수는 얼마 되지 않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리고 지연규 선수는 2006년을 코치로 시작했었고 후반기 투수들의 부상으로 인해 급하게 선수로 복귀한 상태였습니다. 한국시리즈 5차전 6회 2아웃에서 최영필에 이어 지연규가 등판하자 관중들은 걱정하기 시작했지만 지연규선수가 첫타자를 잡아내자 걱정은 환호로 바뀌었고 13번째 타자에게 안타를 맞고 관중들의 기립박수를 받으며 교체되기 전까지 4이닝 12타자를 5삼진을 포함해서 퍼펙트로 막아냈습니다. 결국 15회 연장끝에 1-1로 무승부를 기록합니다.)



 

 2007시즌 2006년 후반기에 보여주었던 좋은 투구를 이어갑니다. 12승 5패 155.1이닝 2.90의 방어율을 기록합니다. 90년대의 빠르고 강력한 직구가 아닌 보통의 직구와 직구보다 더 느린 체인지업 그리고 체인지업보다 더 느린 슬로우커브를 가지고 느리게 더 느리게 더더욱 느리게의 구속변화를 통해 방어율 3위를 기록하며 제 2의 전성기를 시작합니다. 2007년 5월 4일 대전구장 KIA 타이거즈와의 경기에서 개인통산 60번째 완투이자 개인통산 20번째 완봉승을 기록하게 됩니다. 20완봉승은 프로통산 2위에 해당하는 기록입니다. 7년 7개월 10일만의 완봉승입니다. 9이닝 10피안타 1볼넷 투구수 116개로 4-0 완봉승을 거둡니다. 9회 2아웃 타이거즈 손지환을 볼넷으로 내보내고 후속타자 김상훈에게 우중간 펜스까지 가는 깊숙한 안타를 맞았지만 우익수 고동진과 명품수비 2루수 한상훈의 연계플레이로 홈에서 포수 신경현(한화 신경현~♬ 최고의포수 신경현~♬ 한화 신경현~♬ 이글스의 안방마님~♬)이 주자 손지환을 잡아내면서 극적인 완봉승을 만들어냅니다. 팀은 포스트시즌에 진출하게 됩니다 하지만 정민철은 허리부상으로 준플레이오프, 플레이오프 모두 조기강판당하고 팀은 플레이오프에서 두산베어스에게 패배합니다. 이후 2008년 6승 10패 2009년에는 6패만을 기록하게 되고 2009년 9월 12일 대전구장 히어로즈와의 경기에서 은퇴식을 하게 됩니다. 은퇴식 경기 역시 평범하지 않았습니다 히어로즈에게 4회초까지 0-9로 뒤지고 있다가(은퇴식 경기 선발투수 김혁민-_-;;) 이범호 박노민 최진행의 홈런으로 점차 점수차를 좁히더니 9회말 이도형선수의 끝내기 3점홈런으로 11-9 극적인 역전승을 하게 됩니다.(그 당시 최다점수차 역전승 기록-9점차, 2013년 현재 SK와이번스의 10점차 역전승이 최다점수차 역전승 기록입니다) 정말 기적과도 같은 경기였습니다. 그의 등번호 23번은 대전구장 외야에 영구결번이 되었습니다. 그의 전성기를 같이한 55번이 아닌 23번이 영구결번이 된것이 아쉽기도 하지만 후배선수가 달고 있기 때문에 23번으로 영구결번을 하게 되었고 은퇴경기 또한 자신이 선수 엔트리에 들어가게 되면 다른 후배 선수가 2군으로 가야한다며 거절하여 경기에 출전하는 은퇴경기가 아닌 은퇴식을 하게 된 그의 마음 씀씀이에 감탄하게 됩니다. 



통산 성적 - 방어율 3.51  /  161승(통산 2위)  /  128패  /  10세이브  /  60완투(통산 11위)  /  20완봉승(통산 2위)  /  393경기  /  2394.2 이닝(통산 2위)  /  경기당 투구이닝 6.0이닝 (참고로 최근 몇년간 가장 잘던지는 류현진선수가 2011년까지 통산 163경기 1086.1이닝으로 경기당 투구이닝 6.2이닝 )  /  1661탈삼진(통산 4위)



 

           - 사진 출처 : 정민철 은퇴기념 디시인사이드 한화이글스 갤러리





 은퇴후 정민철은 이글스의 투수코치로 활약하고 있습니다. 선수로서 전성기를 맞이했을때 팀전력이 강하지 못했던것이 아쉽고 뛰어난 성적을 올렸음에도 그보다 더 뛰어난 팀선배 송진우에 가려진점이 좀 아쉽지만 이제는 마운드 위에서 당당하게 공을 던졌던 투수, 워낙 공끝이 좋아 자신의 직구를 파울로 쳐내기만해도 기분이 상했던 투수, 선동렬이 자신의 후계자로 지목했던 투수, 포수 박경완이 인정한 최고의 직구를 가진 투수(내가 받아본공중 최고는 정민철의 직구이다), 팬들의 환호에 답해주고 손을 흔들어주는 친절한 선수, 공을 잘 던졌던 투수, 이글스의 암흑기를 버텨준 투수, 90년대 최고의 에이스, 큰손 에이스, 이글스의 Ace23이 아닌 좋은 지도자로서 그의 활약이 기대됩니다. 

나의 최고의 투수 Ace 23 정민철......2011년 11월 15일

 

추가. 정민철 개인 한경기 최다투구수:177구(1992년)

2011/11/17 - [야구는 야구다] - 94년 정민철 경기당 득점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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